[자원활동 수기 공모전] #2, 최지은_나의 변화로 인해 세상이 변하는 것


 


 

 네팔로 비전을 찾아 떠나는 여행
2012년 1월, 나는 네팔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학생 때부터 교육구호에 관심을 갖고 NGO에서 캠페인, 교육, 후원 등을 담당하며 열심히 사람들에게 관심과 행동을 호소했다. 그러나 나의 활동이 진짜 도움이 되는지, 내가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교육은 빈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열쇠인지 직접 보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는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내 또래의 사람들이 직장을 찾고, 돈을 벌고, 미래를 위해 종자돈을 마련하기 위해 앞으로 뛰어 나갈 때 나는 “잠깐 멈춤”을 택했다. “멈춤은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걸어가기 위한 준비이다.” 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조금 느리게 갈지라도 바른 길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소속 최지은입니다.
네팔에는 한국 NGO 활동가들의 정기 모임이 있다. 대부분은 특정 기관을 통해 파견되어 사업을 진행보조하며 생활비 수준의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무소속을 선택했다. 내 이름표에는 “최지은 자원활동가”가 전부였고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무소속을 택하고 자비로 자원활동을 한 것은 자유롭게 다양한 기관의 사업들을 먼저 둘러본 뒤내가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고 싶었고, 제 3자로써 객관적인 자세로 NGO의 활동들을 관찰하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현지 기관들을 탐방한 뒤, 네팔 오기 직전 활동했던 한 NGO의 어린이 노동자 탁아소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행복한 시간, 쿠시홈
 “낙”(뱀)과 “둥가”(돌)가 많아 “낙둥가”라는 이름이 붙은 카트만두 근교 시골마을에 
첫 자원활동을 했던 쿠시홈(행복 어린이집, “쿠시”는 네팔어로 희망)이 있다. 카트만두 근교에는 위로 높이 솟은 고깔 모양의 흉물스러운 굴뚝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것이 벽돌공장의 상징이다. 10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가 되면 벽돌공장이 가동 되고, 네팔 방방곡곡에서 돈을 벌기 위하여 가족들 전체가 이곳으로 이주한다. 그들은 공장주가 할당해 준 구역에 벽돌을 얼기설기 쌓아 비바람만 막을 수 있는 용도의 임시 거처지를 만들고, 앞 공터에 진흙을 빚어 벽돌을 만들고 말리고 벽돌을 옮기는 일에 온 가족이 동원된다. 벽돌 개수가 많을수록 일당이 높아지니 자식들이 다섯 살만 되어도 부모를 도와 허리를 구부려 벽돌을 빚고 말린다. 

 쿠시홈은 벽돌공장에 거주하며 학교를 다지니 않는 만 2세부터 8세까지 어린이들을 해로운 환경에서 보호하고 기초교육을 지원하는 탁아소이다.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현지 직원 자나키, 커리나와 함께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한 명씩 도착하면 얼굴, 손, 발에서 흙, 먼지를 씻어낸다. 아이들이 대강 다 도착하면 직원들은 아침체조를 시작하고, 나는 벽돌공장 아이들의 임시거처지를 다니며 아직 오지 않은 아이들을 찾으러 다닌다. 부족한 네팔어지만 웃으며 엄마, 아빠에게 인사를 하고 아이들이 데리러 왔다고 하면 “일이 많아서 아이 데려다 줄 시간이 없었어요.”, “아이가 몸이 안 좋아요.”, “밥을 먹고 있어요.”, “쿠시홈에 안 가려고 해요.”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얼굴이 붉어지신다. 그럼 밥 먹을 때까지 기다리기도 하고, 놀고 있는 아이를 달랬다가 겁줬다가를 반복하여 어린 아이는 한 손으로 안고, 조금 큰 아이는 나머지 한 손으로 손을 잡고 쿠시홈으로 데리고 온다. 처음에는 엄마, 아빠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아이들이 많이 울기도 하고, 도망도 가서 직원들의 정신과 기운을 쏙 빼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쿠시홈에 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방긋 웃으며 엄마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기도 하고, 집에서 씻고 왔다며 세수하려고 줄 서 있는 아이들을 보며 의기양양해 한다. 아이들은 주니어(2-4살), 시니어(5-9살)반으로 나뉘어 네팔어, 그림 그리기, 춤추기 등 아주 기초적인 것들을 배운다. 현지 직원들과 함께 논의했던 수업계획들은 소용이 없었다. 우리의 첫 수업은 연필 쥐는 법과 아이들이 선생님이 하는 말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아이들이 배우는 동안 나는 간식(비스킷, 따뜻한 우유, 과일)을 준비하고,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수건, 오줌, 똥 싼 바지를 빨래하고, 쿠시홈 일지를 기록하고, 시간이 남으면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다. 아이들이 돌아갔다 해서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바닥을 쓸면 모래와 먼지들이 모래성을 쌓는다. 괜시리 목이 까끌까끌하고 기침이 나온다. 일은 단순했지만 몸이 고되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다가 아이가 손톱으로 얼굴을 긁어 피가 났고, 몸을 구부리고 설거지, 빨래를 하니 손목이 절이고, 등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이 왔다. 몸이 아프니 정신도 약해졌다. 내가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이 일을 꼭 내가 해야 할까. 회의적인 물음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집에서 쉬며 한국을 떠나올 때 다짐했던 목표들을 상기해봐도 한 번 구겨진 마음은 펴지지 않았다. 이틀 뒤, 내가 빠져 힘들어하고 있을 자나키와 커리나를 생각하며 여전히 우울한 심정으로 쿠시홈으로 갔다. 날 발견한 아이들이 서로서로 내 목과 팔, 다리에 달라붙으며 포옹을 하고 뽀뽀를 날려주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날 발견하고 달려와 포옹과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왜 안 왔냐고 안 오는 줄 알았다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눈망울 깊숙이 비춰지는 마음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야 하는 어린 나이에 동생들을 돌보고 부모 일을 돕는다고 어리광 한 번 맘 편히 부려보지 못하고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손을 내밀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오히려 사랑 받고 날 지탱해주었던 것은 이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함께 있어서 쿠시홈에 진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Decrease Child Labour. Increase Child Education
 5월 우기가 시작되면서 벽돌공장은 문을 닫았고 아이들은 자신의 마을로 뿔뿔이 돌아갔다. 어떤 아이들은 건기가 돌아오면 다시 볼 것이었고, 어떤 아이들은 영영 볼 수 없었다. 버스로 이틀 동안 달리고 반나절은 걸어야 집에 도착한다는 아이들은 슬프고 갑갑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부모님의 손을 꽉 쥐며 꼭 집에 가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아이들과 이별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UN이 정한 6.12 세계 어린이 노동 반대의 날 캠페인을 기획하였다. 이 날은 전 세계적으로 어린이 노동 문제에 관한 인식을 증진시키는 캠페인들이 열린다. 네팔시민,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네팔의 어린이 노동 문제를 환기시키고, 쿠시홈 모금을 위해 레드카드 서명캠페인을 준비하였다. 먼저, 자나키와 커리나의 모교에 방문하여 캠페인의 취지를 설명하고, 교내 캠페인을 주도할 뜻 있는 학생들의 모임을 조직했다. 캠페이너들에게 사전 교육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캠페인을 주도할 수 있도록 지켜보았다. 네팔 학교 수업은 교사의 일방적인 지식 전달 식이고 캠페인 같은 대외 활동도 학교에서 조직하여 학생들은 취지 및 목적도 모른채 인원 충원을 위해 동원된다. 이런 캠페인에 길들여져있던 학생들은 자신들이 날짜와 방법을 정하고 캠페인을 진행한다는 것에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설레여 했다. 우리 역시 아이들을 믿고 맡기는 것이라 그 결과가 어떨지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네팔 학생들은 생각보다 훨씬 창의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각 학교들은 어린이 노동 문제에 관해 시 낭송, 그림, 모금, 연극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였다. 버스의 차장, 길에서 구걸하는 아이,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는 아이, 청소 하는 아이들을 주변에서  쉽게 봐 왔던 이 네팔아이들은 왜 자신과 같은 나이의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일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며 고백했다. 어린이는 노동이 아닌 교육 받고 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고 공통적으로 입을 맞췄다. 한국학생들과 비슷한 캠페인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어린이 노동을 볼 수 없는 한국학생들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네팔학생들이 느끼는 정도는 달랐다. 캠페인이 네팔 어린이 노동 문제를 해결할 순 없지만 모든 변화는 관심에서 시작된다. 네팔 안에서 관심을 갖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 진정 해결을 위한 작은 빛을 발견할 수 있다.

  5개월이 정신없이 지나고 뜨거운 7월이 되었다. 나는 다른 기관을 모색 중이었다. 쿠시홈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농가소득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쿠시홈 아이들의 부모들은 농촌에서 소득이 없어 벽돌공장으로 이주하여 노동한다. 부모를 따라오는 아이들은 계속해서 학교를 다닐 수 없다. 가끔 어린 자식들은 마을에 남겨두고 오니 가족이 떨어져 산다. 어릴 적부터 흙먼지, 매연이 많은 벽돌공장에서 사는 아이들은 아픈데가 많다. 이 아이들은 커서 비슷한 일을 하고 빈곤은 되물림 된다. 그래서 이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교육과 농가 소득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네팔 커피 농민들과 공정한 거래를 하는 커피회사에서 네팔커피 홍보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내가 배운 것들,,
네팔은 이래저래 특별한 곳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북부 히말라야 고봉에서 인도와 접한 남부 평야지대까지 다양한 자연환경이 펼쳐져 있고, 이에 따라 수많은 민족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해왔다. 나는 자주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이방인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 70-80년대 초반의 모습 말이다. 집안일과 동생 돌보기를 야무지게 하는 네팔의 어린 소녀들을 보면 우리 엄마의 어린시절을 그려볼 수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 낮은 건물, 버스의 차장,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도로들, 전통 옷을 입고 다니고 사원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묘하게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최근에 한 통계는 네팔이 세계에서 8번째로 살기 끔찍한 나라라고 발표했다. GDP, 빈곤율, 낮은 고용율, 높은 물가, 인프라 부족, 부정부패, 공기오염 등이 이러한 결과를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통계 수치들은 네팔 사람들의 인간미, 문화, 종교적 신실함, 자연에 대한 경외심 등을 담아내지 못한다.

 네팔에서 1년 넘게 자원활동을 하며 깨달은 것은 무엇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이다. 그 핵심은 관계의 평화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내 마음은 평화롭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다른 사람과 관계, 자연과 관계 역시 평화로울 수 있다. 네팔은 부족한 것 투성이다. 불편하다고 불평하면 곧 불행해진다. 나는 이 불편함에 적응 했고 극복하니 더욱 풍요로워짐을 알았다. 네팔은 매일 평균 9시간 씩 정전이 되고 전기 제품을 잘 사용할 수 없다. 어둠 속에서 할 일이 없으니 긴 긴 밤 동안 나는 음악을 듣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내가 누구일까 고민하고 촛불 아래 일기를 썼다. 가족과 친구가 없는 타지에서 사람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나무, 새, 꽃들이 자연스럽게 일상에 스며든 자연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사람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네팔에서 좋은 사람들을 사귀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사람들 덕분이었다. 네팔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마음을 열어 주었고 가족처럼 보살폈다. 운도 따랐지만 내가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열심히 네팔어를 배웠고, 먼저 다가갔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가끔 네팔에서 자원활동을 하는 친구들 중에 네팔어를 전혀 배우려 하지 않는다거나 네팔 문화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로서는 많이 안타까웠다. 값진 보물들을 놓치고 있는 거니까. 결국, 자원활동은 내가 누구를 도와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가족과 친구라는 좁은 관계망을 넘어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씨앗을 마음에 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의 변화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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